이것은 조금 거창하고 쌩뚱 맞은 이야기. 신촌 살인 사건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중간고사를 거쳐 선택지와 윤리 의식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신촌 살인 사건은 자극적이다. 모든 요소를 갖추었다. 오컬트라는 다소 생소하지만 꺼림칙한 문화. 사소한 갈등으로 인한 살인, 살인에 가담한 당사자들의 태연자약함. 비정상적인 사건의 비정상적인 주체들. 언제나 그랬듯이 사회는 변함이 없겠지만 호들갑은 빼놓을 수 없다. ‘사령카페’를 단속해야 한다는 이야기부터. 청소년들의 무분별함까지. 으레 터져 나왔던 비판들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호들갑은 호들갑답게 사그라들 터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주목했다. 바로, 중간고사에.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정의된 그 청소년들은 왜 중간고사를 보러갔을까. 혹자는 그 청소년들의 무시무시함을 거론하며 현실과 괴리된 인간이기에 중간고사를 봤다고 말을 하며 치를 떤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인간에게 중간고사와 학교는 무슨 가치를 가질까. 이미 현실과 괴리된 인간에게 중간고사는 무슨 소용이고 학교는 무슨 소용일까. 비현실의 테두리 안에 이번 신촌 살인 사건을 묶기에 어려운 이유다. 오히려, 청소년들이 범죄 사실을 은닉하고 시체 은폐를 시도했으며 피해자의 핸드폰을 부셨다는 점까지 생각해본다면, 그 청소년들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렇다면, 이 현실적인 청소년들은 왜 사소한 갈등으로 한 인간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을까. 무엇보다 그들은 피해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분노가 폭발한 우발적 살인은 아니었다. 치밀하든 부실하든 계획은 있었다.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선택지도 많았다. 그러나 그 청소년들은 살인이란 선택지를 택했다. 중요한 부분은 여기다. 바로 많고 많은 선택지 중, 살인을 선택했다는 점. 왜. 살인이 선택가능한 선택지, 비현실적이지 않은 선택지라고 생각됐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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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생각이 난다. 이미 우리 곁을 지나갔던 비스무리한 선택들이.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안위와 쾌감을 위해 동급생을 거의 노예 취급하며 구타한다. 노예 취급으로 성이 안 찼는지 한 여성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친구를 가둬놓고 성매매를 시키기까지 한다. 이외에도 인터넷 뉴스를 가득채운 자극적인 뉴스들. 사람들은 그 선택들이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일부라고 수긍하는 현상까지 있다.

봉인이 풀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선택지들이 범람한다. 살인이라는 선택지, 구타라는 선택지를 일반인들이 쉬쉬하고 있을 뿐이지 정도가 약한 폭력은 일상적이지 않은가. 윤리와 비윤리 사이에 존재했던 벽은 부셔지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인식 자체가 힘들어지고 있다. 신촌 살인 사건은 비윤리적 선택지에 대한 봉인 해제의 전초전 중 하나다.

당연한 수순이다. 윤리가 무엇인가. 뜬구름 잡는 고고한 이야기 아닌가. 한번 이야기할라치면 오금이 저리는 주제 아닌가. 자기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윤리는 무슨 윤리인가. 남을 짓밟아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마당에 윤리는 무슨 윤리인가. 내 한 몸 잘 먹고 잘 살면 되었지 윤리는 무슨 윤리인가. 그렇게 윤리는 어줍지 않은 이야기가 됐고 우리의 선택지에 선택돼서는 안 될 선택지들이 늘어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므로 신촌 살인 사건은 단순히 비현실적인 인간들이 벌인 비정상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가 우스워진 시대에 대한 경종이다. 그것은 비윤리적 선택지의 봉인해제를 알리는, 복잡하고도 불안한 조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