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던 고통의 시간들은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법이니까. 우리를 하루하루 궁상의 극치로 몰아가던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고, 한 숨 깊이 자고 일어나니 여유로운 기운이 내 주위에 가득하다. 이렇게도 여유로운 기분과 딱히 할 일 없는 하루의 조합이라니! 시험 신경 쓰느라고 진이 빠져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해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게다가 날도 참 포근하고 화창하다. 그래 오늘이야! 오늘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엣지 있게 낭만적으로 보내기로 결정!


Episode #01

아침 햇살은 조금 작은 창이지만, 내 방 창문을 타고 내 책상 위로 작렬해 주시고, 이럴 땐 좋은 음악을 적당한 볼륨으로 틀어 놓고 토스트를 아삭아삭 씹으며 모닝커피를 마셔야 할 것만 같다. 노트북을 켜고 찬찬히 어떤 음악이 좋을지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이런 시간에 ‘치티 치티 뱅 뱅’이나 ‘오 마이 매직 엄머엄머하고 놀랄 걸’은 아닌 것 같아서 외국 노래들을 찾는다. 아니 근데 그렇다고 레이디 가가를 듣기에도 참 애매해 주시고, Maroon5 정도? 적당한 것 같기도 하고 한데 너무 흔해 빠져서 마치 허세의 대표주자가 될 것 같아서 포기. 그러다 생각난 것은 월드뮤직! 가끔 새벽에 라디오를 들어야만 들을 수 있는 월드뮤직! <미쓰 홍당무>에서 이종혁이 그렇게 심취해서 CD를 쌓아놓고 듣던 바로 그 월드뮤직! 오, 뭔가 낭만적이다. 음악 사이트 월드뮤직 카테고리에 들어가니 또 다시 많은 분류가.. 음, 아무래도 아침 시간이니 샹송이 좋겠다. 그래, 나 나름대로 프랑스어 배운 남자...! 하지만 샹송 페이지를 클릭해 봤지만 역시나 모르는 노래들만 가득이다. 하는 수 없이 전체 섞어듣기를 선택해 놓고 토스트나 만들러 가야겠다. 딸깍.



▲ KBS2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샹송을 부르는 예지원과 지현우 (방송 영상 캡쳐)


쥬 부드레 뒤 솔레 베르~ 오 오 오 가사가 조금씩이지만 들려, Keren Ann이 나지막이 읊조리는 목소리 역시 샹송은 진리. 라고 생각하고 샹송의 완성을 위해 빵을 찾으러 갔는데 이런 시험기간 동안 방치해 둔 식빵이 어느새 눅눅함 120%의 자태를 자랑한다. 아오..... 시험공부 좀 몇 시간 더 하겠다고 마셔댔던 드립커피도 지금 보니 바닥...... ㅋ 빅맥을 부르는 번호에 전화해서 맥모닝 세트를 배달시킨다. 아, 이런... 낭만이 어쩌고 해놓고 겨우 패스트푸드라니... 실망 게이지가 점점 차오르고 있는데, 랜덤듣기 해 놓은 샹송들은 갑자기 아침에 맞는 조용하고 상큼하고 이런 샹송이 아니라 웬 프랑스 록이 나온다. 프랑스 말이 안 아름다울 때도 있구나.... 아오 월드뮤직도 뭘 알아야 듣지... ㅠㅠ 결국 처음에 버렸던 치티 치티 뱅 뱅'을 듣고 ‘우리는 오 앺터 스꾸럽 너흰 모두 비켜라’를 듣고 있다. 뭐, 15분 만에 온 맥머핀이 좀 음 그래 맛있긴 하다. 와 유행가에 맥모닝이라니... 참 낭만적이군.




(출처 : http://cafe.naver.com/minibab/14)


Episode #02

아침은 좀 망했지만 뭐 그래도 아주 나쁘진 않다. 아침에 잔뜩 난리를 부려놓고 뭐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잉여가 되어 드라마 <파스타>를 복습하기 시작했다. 오? 오? 오? 저것! 그래, 내가 지난번에는 바쁘다고 파스타 만들기 따위 안 하고 그냥 파스타 본 다음 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었지. 이번엔 시간도 많고 한 번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심지어 오늘의 컨셉 낭만과도 딱 어울리잖아? 드라마 파스타에 나온 ‘알리오 올리오’는 만들어 본 애들이 레시피대로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그냥 그랬더라는 말을 많이 했던 게 기억난다. 그래 난 그냥 느끼한 ‘까르보나라’. 그리고 파스타만으론 느끼하니까 <작업의 정석>에서 송일국이 만들던 것처럼 샐러드를 곁들여서! 좋아, 집에서 열심히 만들어서 잘 되면 이웃에 사는 친구들도 집으로 불러야겠다.

마트에 가서 카트를 끌고 혼자 신나서 장을 본다. 까르보나라의 재료인 베이컨, 양파, 좀 비싸지만 오늘만은 기분을 내서 파마산 치즈가루와 파슬리가루도 카트에 담는다. 샐러드는 조금 귀찮으니까 팩으로 담겨 있는 것을 사고 거기에 얹을 닭가슴살과 토마토만 조금 준비하기로! 흠 근데 문제가 발생했다. 드레싱이 맘에 드는 게 없어... 예전에 마트에서 파는 것들 먹어봤는데 맛이 레스토랑에서의 그 맛이 아니고 뭔가 비릿하고 이상...했던 게 기억나서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뭐, 올리브유랑 식초 이런 거 다 있으니까. 근자감이 점점 드는 게 뭔가 불안한 감이 점점 솔~솔~



(출처 : http://cafe.naver.com/tetizen/14468)


재료를 다 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생크림을 사려고 찾아보는데, 아놔 여긴 딱히 동네 마트도 아니고 꽤 큰 마트인데 생크림도 없고, 휘핑크림도 없고, 크림이란 크림은 그 자취를 감추었다. 직원에게 물어봐도 떨어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이런 말만 되풀이... 아 진심 짜증이 솟구친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그렇게 진짜 다 갖춰놓고 쉽게 쉽게만 만들던데... 나? 결국 베이커리를 몇 군데 돌아다니면서, 안 판다는 생크림을 동냥으로 사왔다. 원래 그 생크림 쓰는 거 아니라던데.. 어쩔 수 없지.

아 뭔가 삐걱삐걱 거리더니 결국 일이 나고야 말았다. 애들을 부르긴 무슨. 샐러드도 완성되고, 까르보나라도 완성되었는데 맛이 병 투 더 신 투 더 웩스 웩스 ㅋㅋㅋㅋㅋㅋ 아무래도 드레싱과 크림소스를 내가 만들겠다고 했던 건 허세였던 것 같다. 그냥 파는 거 소스 많은데 사올 걸... 아니 걍 요리를 하지 말 걸. 설거지할 것만 많아지고, 양도 조절 못해서 너무 많이 만들었는데 맛은 없고 이거 언제 다 먹음? 하하하하 호호호호 히히히히 으흐으흐



(출처 : http://blog.naver.com/eunkiya?Redirect=Log&logNo=100018082032)


Episode #03

아 잠시 평정을 잃었다. 난 오늘을 여유 있는 기분으로 보내기로 했었지. 그래 아무래도 내 좁은 방에서 낭만을 꿈꾼다는 게 말이 안 됐던 것 같다. 밖으로 나가자. 여유롭게 걸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자. 집이 도심 근처라서 천천히 걸어서 덕수궁 돌담길로 간다. 와, 이런 한적하면서 예쁜 길! 정말 오늘 최고의 낭만이다. 이대로 걸어서 청계천을 따라 쭉 걸어야지. 서울시립미술관을 기웃거리다가 관람료가 비싸서 관뒀지만 그래도 뭐 어때. 아뿔싸. 그런데 걷다 보니 느껴지는 아찔한 기분. 뭐야.... 나만 혼자잖아... 하긴 이 좋은 날씨에, 삼삼오오 몰려나온 청소년들과, 연인들, 가족들 사이에 나만 혼자 걷고 있어. 기분은 점점 낭만적이기 보다는 암흑에 빠져들고 말았고, 결국 이것을 타개할 대책은 내가 왕따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출처 : http://photo.naver.com/view/2010030904134516954)


날이 뉘엿뉘엿해질 때쯤에서야, 겨우 한 친구와 마음이 맞아 한강 둔치에서 이야기나 하기로 했다. 맥주나 마실까 하다가, 내 낭만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들은 친구가 갑자기 와인이 마시고 싶단다. 우리는 와인을 잘 모르니 마트에서 가장 스윗한 걸로 추천해달라고 해 놓고 결국 가장 싼 건 아니고 두 번째로 싼 와인을 집어 들고 한강으로 갔다. 하하. 그런데, 낭만은 커녕 아우 날은 좋은데 왜 이렇게 강바람은 거센 것인가. 게다가, 와인은 사왔는데 와인 오프너를 안 사왔고, 대책 없이 와인 잔도 준비를 안했다. 아 이것은 정말 최악. 와인 목을 살짝 깨서 종이컵으로 먹은 와인이라니.....




(출처 : http://blog.naver.com/flyme2thesky?Redirect=Log&logNo=50068988162)


Epilogue

낭만적이고 싶었던 하루, 낭만적이기에 난 너무도 낭만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낭만을 누리기에도, 허세를 떨기에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하루. 낭만은 커녕 이상한 추억만 잔뜩 쌓인 하루.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상상일 뿐이었고, 난 그냥 하루 종일 집 안의 잉여 한 마리였다. 그냥 시험 끝나서 너무 힘들어서. 낭만적으로 하루라도 보내기 참 어렵다.